버즘나무[학명: Platanus orientalis L.]는 버즘나무과의 낙엽활엽교목이다. 플라타너스(Platanus)의 공식적인 우리 이름은 ‘버즘나무’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나무의 껍질을 보고 학자들은 쉽게 버짐을 연상했다. 가난하던 개화기 시절의 어린아이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녔다. 그런데 영양이 부족하여 흔히 마른버짐(버즘)이 얼룩덜룩 생기는 경우가 흔했다. 플라타너스의 껍질은 갈색으로 갈라져 큼지막한 비늘처럼 떨어지고, 떨어진 자국은 회갈색으로 남아서 마치 버짐을 보는 듯했다. 서양 사람들은 에델바이스니 물망초니 하는 낭만적인 식물 이름이 많은데, 우리는 하필이면 아름다운 나무에 지저분한 피부병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였느냐고 사람들은 불평한다. 차라리 영어 이름인 플라타너스를 그대로 쓰자는 의견도 많다. 북한은 낙엽 진 겨울날 기다란 끈에 방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그란 열매의 특징을 살려 ‘방울나무’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가로수와 공원수, 녹음수로 많이 심는다. 우리가 흔히 플라타너스(버즘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에는 진짜 버즘나무와 양버즘나무(학명: P. occidentalis L. 영명: buttonwood, buttoneball, whitewood) 두 종류가 있다. 최근에는 단풍버즘나무도 들어와 있다. 버즘나무는 열매가 한 대궁에 2~3개씩 열리고 잎이 깊게 갈라지며, 양버즘나무는 한 대궁에 열매가 한 개씩 열리고 잎이 깊게 패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것은 거의가 양버즘나무다. 꽃말은 ‘천재’, ‘휴식’, ‘용서’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플라타너스를 낭만의 나무로 인식하게 한 것은 1913~1975년에 걸쳐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살다 간 서정시인 김현승의 시「플라타너스」와 김수용 감독의 영화 만추」(1981)일지도 모른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플라타너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플라타너스/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플라타너스/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플라타너스/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플라타너스/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문예』지에 1953년 6월호에 발표하였다. 이국적인 나무이면서도 우리에게 친숙해져 버린 플라타너스를 그는 의인화시켰다. 그리고 삶에 대한 외로움과 슬픔을 나무에 얹어두고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나무를 낭만의 나무로 생각하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볼 수 있었던 나무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제강점기에 생긴 초등학교 교정에는 거의 어김없이 이 나무가 살고 있다. 물론 한국의 버즘나무는 미국에서 건너온 양버즘나무지만 열매의 맺는 방식만 제외하면 플라타너스와 같다. 잎 가운데 열편이 길고 열매가 2~6개 정도 달리면 버즘나무이고, 가운데 열편의 길이와 폭이 비슷하고 열매가 주로 2개씩 달리면 단풍버즘나무이고, 가운데 열편이 길이보다 폭이 더 넓으면 양버즘나무이다.
현재도 전국 곳곳에 버즘나무 가로수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버즘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심은 이유 중 하나는 토양을 정화시키는 나무, 즉 ‘정토수(淨土樹)’라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공해에 잘 견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 나무의 꽃가루가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심기는커녕 무자비하게 잘라 버린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서도 이 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건물에서 교육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교육이 야외에서 이루어졌고, 종이가 귀한 시절에 교육 방법은 대부분 문답식이었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듯이,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도 플라타너스 아래서 제자들에게 의술을 가르쳤다. 그리스 에게 해 동남쪽에 위치한 코스 섬에는 히포크라테스가 제자를 가르쳤다는 플라타너스가 살고 있다. 이곳의 플라타너스는 기원전 2세기경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보다 나이가 많다. 목질이 잘 썩는 플라타너스가 2천 년 이상 산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지 모르지만, 나무의 생명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플라타너스의 속은 텅 비어 있지만, 나무는 껍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나무는 뿌리에서 껍질 속으로 물을 올리기 때문이다. 이곳의 나무는 비잔틴 양식의 둥근 지붕 아래 자그마한 터키풍의 샘이 있는 우아한 광장 한쪽에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의 플라타너스는 2,500년 전의 나무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의 나무는 2,500년 전의 나무의 후손이다. 사람이 후손을 남기듯 나무도 죽으면서 후손을 남긴다. 나이 많은 나무를 보면 같은 몸에서 후손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높이 약 30m이다. 줄기는 곧게 서고 원산지에서는 나무껍질이 큰 조각으로 떨어지며 떨어진 직후에는 흰색이지만 점차 잿빛을 띤 녹색이 된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 모양 원형이며 나비 10∼20cm이다. 5∼7개로 깊게 갈라지는데, 각 갈래조각에는 크고 날카로운 톱니가 있다. 가운데갈래조각은 길이가 나비보다 길며 톱니가 드문드문 있거나 밋밋하다. 잎자루는 길이 3∼8cm로서 밑동의 어린 겨울눈을 둘러싸고 턱잎은 작다.
꽃은 5월에 붉은색으로 암수한그루로서 단성화의 두상꽃차례이다. 수꽃이삭은 잎겨드랑이에 달리고 암꽃이삭은 가지 끝에 달린다. 열매는 구과(毬果)로서 지름 3cm 정도인 공 모양이며 길게 늘어진 자루에 2∼6개가 달리고 9∼10월에 익는다. 종자나 꺾꽂이로 번식한다.
생약명(生藥銘)은 정보가 없다. (참고자료: 원색한국식물도감(이영노.교학사), 한국의 자원식물(김태정.서울대학교출판부), 네이버·다음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생명과학 사진작가)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