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마할(Taj Mahal)은 인도 북부 무굴 제국의 수도였던 인도 아그라(Agra) 남쪽, 자무나(Jamuna) 강가에 자리 잡은 궁전형식의 묘지다.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재위 1592~1666)이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하여 건축한 것이다. 원래 이름은 왕비의 이름에서 유래된 뭄타즈 마할 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바뀌어 타지마할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인도의 대표적인 이슬람 건축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1983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타지마할은 시공을 초월한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22년 동안이나 그 무덤을 지었다는 한 남자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 깃들었기 때문일까? 인도 이슬람 예술의 걸작 건축물로 그야말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빛깔을 달리하며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고, 웅장한 건물은 중압감은 커녕 오히려 공중에 떠있는 듯 신비롭고, 건물과 입구의 수로 및 정원의 완벽한 좌우대칭은 균형미와 정갈함을 느끼게 한다. 무굴 제국은 물론 이탈리아, 이란,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의 건축가와 전문기술자들이 불려오고, 기능공 2만 명이 동원되어 22년간 대공사를 한 결과물이다. 최고급 대리석과 붉은 사암은 인도 현지에서 조달되었지만, 궁전 내외부를 장식한 보석과 준보석들은 터키, 티베트, 미얀마, 이집트,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국가 재정에 영향을 줄 정도의 거액이 투자되었다고 한다. 타지마할은 황제의 애절함이 배어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백색의 대리석 돔은 부드럽고 풍만한 왕비를, 사방에 세운 뾰족탑은 황제를 상징하는데, 죽은 왕비를 지켜 주려는 황제의 마음이 서려있다. 타지마할은 왕의 사랑과 쏟은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찬란한 무덤’이라 불리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사랑의 금자탑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아치형 정문을 통과하면 넓은 뜰에 수로가 있는 무굴양식의 정원이 펼쳐진다. 길이가 약 300미터에 이르는 일직선의 수로 중앙에는 연꽃 모양의 수조가 있고,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있다. 수로에 비친 타지마할의 모습 또한 환상적이어서 수많은 사진가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긴 수로의 끝에는 눈부신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본 건물이 서 있다. 네 모퉁이에 배치한 첨탑을 비롯해 좌우가 정확한 대칭을 이룬 건물은 육중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인공으로 만든 7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진 건물은 한 면의 길이가 58m 정도이고, 중앙 돔이 세워진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65m에 달한다. 그리고 동서남북의 모퉁이에 세워진 미나레트(기도탑)의 높이도 50m나 된다. 중앙 돔을 중심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타지마할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건물을 보다 환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하여 바깥쪽으로 조금 휘어지게 건축한 것이다. 당시에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이렇게 건축했지만 결과적으로 지진이 발생해도 무너지지 않는 효과를 얻게 되었단다. 타지마할을 둘러보면 우아한 꽃과 코란(이슬람교 경전), 독특한 문양의 조각이 반복적으로 장식된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대리석 위에 새겨진 조각과 문양은 아름다우면서도 하나같이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장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건물 안에는 가지각색의 돌로 아름답게 꾸며진 묘가 있다. 역대 이슬람 황제들은 성을 짓는데 붉은 사암을 즐겨 사용하였다. 타지마할은 그런 전통에서 벗어나 백색 대리석을 주재료로 삼았다. 이는 힌두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뿐만 아니라 흰도 교 사원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대리석 격자 세공에 이슬람 풍의 아치를 걸었다. 문에 새긴 연꽃도 흰도 교와 관계가 깊다. 바깥면의 아라베스크와 갈매기 무늬는 전형적인 이슬람 풍인데, 대리석에 홈을 파고 거기에 갖가지 보석을 덧붙였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것을 흰두 교 기술자가 마무리하였다. 타지마할 건물이 완성될 당시에는 뭄타즈 마할의 묘만 있었지만 현재는 샤 자한 황제와 뭄타즈 마할이 함께 잠들어 있다. 물론 화려하고 우아한 꽃으로 장식된 관은 모형이고, 실제 시신은 타지마할의 지하에 있단다. 황제와 왕비가 잠들어 있는 묘지 주변은 나지막한 칸막이가 둘려 있어 묘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내부와 외부의 벽면은 보석과 준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이 활용되었다. 샤 자한 왕은 애초 타지마할과 마주보는 자무나 강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묘를 짓고, 구름다리로 연결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무나 강 건너편에서 건물의 기단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진위 여부는 확실치 않다.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 샤 자한은 10년 뒤인 1658년 막내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의 반란으로 왕위를 박탈당하고 아그라 요새(Agra Fort)의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 탑에 갇혀 말년을 보냈다. 다행히도 아그라 요새에서는 2km 떨어진 타지마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1666년 죽은 뒤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 옆에 묻혔으니 마냥 불행하기만 한 말년은 아니었던 듯싶다.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 샤 자한은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원정길에 올랐다. 함께 원정길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왕비인 뭄타즈 마할도 있었다. 뭄타즈 마할은 ‘궁정의 선택받은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샤 자한 황제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자한기르가 직접 내려 준 이름이란다. 황제들은 전쟁터로 떠나거나 장거리 원정에 오르면서 훗날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를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왕비를 전쟁터까지 데려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왕비를 전쟁터까지 데려간 것은 아내인 동시에 정치적인 조언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데칸고원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왕비는 근처의 야외 천막에서 14번째 아이를 낳은 뒤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몹시 사랑했던 왕비가 죽자 전쟁터에서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2년 동안 왕비를 추모하는 기간을 갖도록 했다. 슬픔에 빠져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왕은 왕비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묘를 만드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1년에 걸친 고민 끝에 아그라 성에서 가까운 야무나 강변에 사랑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시작된 타지마할 건설은 22년이 걸렸고, 마침내 그 어떤 건축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지마할에는 기하학적인 공간들이 있다. 타지마할 동쪽과 서쪽에는 타지마할을 향해 같은 모양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동쪽 건물은 나라에 중요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머무는 영빈관으로 사용하였으며, 서쪽 건물은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활용했다. 하지만 두 건물을 지은 진짜 목적은 타지마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타지마할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붉은 사암과 대리석으로 지어진 영빈관과 모스크도 매력적인 건축물이다. 두 건물의 정면과 중앙 부분의 대리석에 새겨진 아름다운 꽃과, 벽과 천장을 장식한 조각들은 섬세함과 세련미를 자랑하고 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타지마할 정원도 기하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거대한 정사각형 정원은 수로와 길을 따라 크게 넷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공간들은 다시 4등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커다란 정사각형 안에 16개의 정사각형 정원이 자리한 모습이다. 전체로 보나 작게 쪼개 보나 정사각형의 형태를 드러나게 만든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기하학적인 생각에서 나온 거란다. 타지마할에 들어가려면 2개의 출입문을 통과해야 한다. 먼저 동쪽, 서쪽, 남쪽의 출입문을 통과한 뒤 안쪽의 커다란 문을 통과해야 정원에 이르게 된다. 안쪽에 위치한 출입문은 타지마할 동쪽과 서쪽에 세워진 영빈관, 모스크와 비슷한 건축물이다. 다만 영빈관과 모스크는 건물 위쪽이 돔 모양이지만, 이 출입문은 인도의 이슬람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차토리(돔 모양의 작은 탑)로 장식되어 있다. 차토리는 산스크리트어로 우산을 의미하는데 모양은 둥근 원에 가깝고 크기는 돔보다 작다. 타지마할은 처음 완성되었을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고 호화로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단다. 하지만 그 화려함 때문에 끊임없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장식된 값비싼 보석들은 도굴꾼과 침략자들에 의하여 사라졌다. 그 대표적인 나라로 영국을 들 수 있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거대한 돔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떼어내고 그 자리를 구리로 덮었으며, 은으로 된 출입문을 녹여 가져가고 대신 청동 문을 달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옛 모습을 되찾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보석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의 박물관과 개인 저택, 문화 공간을 장식하고 있단다. 인도의 장례 문화는 오랜 역사와 여러 종교와 풍습으로 인해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다양한 장례 문화를 갖고 있다. 타지마할처럼 화려한 무덤부터 시신을 새들에게 먹이로 주는 조장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고대 인도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화장을 하며, 화장하여 나온 유골을 강이나 산에 뿌리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를 믿는 일부 불교 신자들은 시신을 독수리의 먹이로 제공하기도 한다. 힌두교의 장례 문화도 불교와 비슷하다. 다만 힌두교를 믿는 인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보관하지 않고 3~4시간 뒤 바로 화장을 한다. 화장으로 나온 유골은 힌두교와 관련된 성스러운 장소에 뿌리고 있다. 물론 간디 같은 유명 인사들은 따로 묘지를 만들어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은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을 하고 있다. 매장할 때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을 향하도록 하며, 우리나라처럼 봉분을 세우지 않고 관을 그대로 사용한다. 인도에 사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은 아직도 매장을 많이 한다. 그리고 적은 숫자지만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도 조장을 하고 있다. * 채널A 스마트리포터 영상: http://blog.daum.net/yil2078/4886948 인도(India, 印度)는 정식 명칭은 인디아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며, 수도는 뉴델리(New Delhi)이다. 서쪽으로 파키스탄, 북동쪽으로 중국·네팔·부탄, 동쪽으로 방글라데시·미얀마와 국경을 접한다. 면적은 328만 7263㎢ 로 세계 제7위이고, 인구는 1989년에 8억743만 명으로 세계 제2위였으며, 2015년 현재는 12억 5169만 5584명(2015년 현재)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북방의 아리안족(70%)과 남방의 드라비다족(25%)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힌디어(연방공용어)(32%)와 영어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종교는 힌두교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회교(11.4%)·기독교·시크교(2%)·불교 등을 믿고 있다. 기후는 전체적으로 열대몬순기후를 나타내며, 3월에서 5월에 이르는 건조혹서기(乾燥酷暑期), 6월에서 10월 상순에 이르는 습윤고온기(濕潤高溫期), 그리고 10월에서 2월에 이르는 건조한랭기(乾燥寒冷期) 등의 삼계(三季)로 되어 있다. (글과 사진: 이영일,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