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로 조선을 경영한 정승, 명재 윤증(明齋 尹拯)
윤증 초상 일괄(尹拯 肖像 一括, 보물 제1495호)은 ‘崇禎紀元後再甲子四月摹’ 라는 묵서가 있는 측면전신좌상은 1744년 작품으로,『영당기적』에 ‘崇禎紀元後, 再甲子四月, 影子移摹四本, 正面一仄面三. 畵師張敬周’라고 밝혀져 있어 장경주의 작품으로 확인된다.
윤증초상 2점은 ‘崇禎紀元後三戊申二月摹’라는 묵서를 지닌 1788년작『영당기적』의 내용을 통해 이명기가 모사했음을 알 수 있다. '영당기적'에 따르면 정면 1본과 측면 1본은 신법을 가미하여 그리고, 구본의 화법을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구법을 따라 측면 1본을 그렸다.(故倣甲子正面點化之例, 略加新法, 摹出正仄各一本, 而舊本畵法, 亦不可不傳於後. 故又出仄面一本, 純用舊摸法)고 한다.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윤증이 차지하는 비중과 함께 현존하는 장경주와 이명기가 그린 <윤증초상(尹拯肖像)>은 조선후기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회화적 격조를 지니고 있어 중요성을 지닌다. 아울러 '영당기적'은 초상화 제작과 이모과정 그리고 세초의 전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윤증(尹拯, 1629~1714)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다.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에게 사사받았고, 이후 유계(兪棨),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박세채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스무 번이나 벼슬을 권했으나 86세로 생을 마갈할 때까지 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선비정신을 높이 평가한 왕은 팔순이 넘은 명재에게 우의정을 자리를 권하였을 때에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생애에 조선시대에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 임금이 있었는데 군왕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고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라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윤증(尹拯)이 1714년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유림에서 그의 도덕을 칭송했으며(儒林尊道德)/ 나 역시 그대를 흠모했소(小子亦嘗欽)/ 평생에 얼굴 한 번 대한 일 없기에(平生不識面)/ 아쉬운 마음 더욱 간절하구려(沒日恨彌深)라고 하였다.
「명재언행록(明齋言行錄)」에는 “이익을 따라 행하면 원망이 많다. 우리 가문이 선대 이래로 남에게 원망을 듣지 않은 것은 추호도 남의 일을 방해하지 않았던 데 있다. 이는 자손이 마땅히 삼가 지켜야할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학운동 때도 존경받는 어른의 집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고, 후대에도 이어져 1939년 흉년에는 주민을 돕기 위한 공사를 일부러 벌이고 대가로 쌀을 나눠주었다. 요즘의 시대정신으로 본받았으면 한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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