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함께한 팔미도등대
팔미도등대(八尾島燈臺.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높이 7.9m, 지름 2m의 등대이다.
1880년 원산항 개방으로 인천과 부산항도 개항하라는 외세의 압력을 받았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근대식 등대가 없어서 열강의 배가 암초 등에 부딪혀 사고가 많았었다. 일본은 조선에 근대식 등대를 요구하여 1894년에 공무아문이 설치되고, 1902년 5월 소월미도, 북장자서, 백암등표와 함께 건축에 착수하여 1903년 4월에 준공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일 국내 최초로 점등되었고, 일본제국주의에 불빛을 열어주었다.
현재의 팔미도 등대는 등탑 높이 26m, 전망대, 100주년 기념 상징조형물 ‘천년의 빛’, 위성항법보정시스템(DGPS)기준국 등의 시설과 첨단장비를 갖추고 2003년 12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였다. 등명기 불빛은 국내기술로 개발된 프리즘렌즈 대형 회전식 등명기로 50km까지 비추며, 10초에 한 번씩 번쩍인다.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은 앞 다투어 인천항에 자국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으며 그때마다 팔미도 등대는 침략의 이정표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등대는 그 나라 힘이 약할 때는 침략의 거점이고 힘이 강할 때는 개항의 상징이라서 등대의 역사는 곧 개항의 역사이며 그 나라 국력의 바로미터이다.
팔미도는 사주(沙洲)에 의하여 연결된 두개의 섬이 마치 여덟팔(八)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八尾島)라 불리고 있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던 해상 경승지였다. 서남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해상교통 흐름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고 인천항에서 15.7km 남쪽에 있다. 팔미도에는 주민은 살지 않는다. 팔미도 둘레길은 소나무와 소사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와 칡, 담쟁이넝쿨, 패랭이꽃 등이 서식하고 있다. 팔미도 유람선은 하루에 세 차례씩 운행하나 예약한 사람이 스무 명이 되어야 출항한다. 꼭, 미리 확인해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 전날인 1950년 9월 14일 오후 7시. 연합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최규봉 미 극동사령부 켈로부대(KLO) 부대장에게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라고 명령했다. 15일 새벽 1시 45분 등대 불이 켜지고, '작전 명령'이 떨어지자 15일 오전 6시 206척의 함정에 타고 잇던 한미해병대 7만여 명의 군인이 월미도 상륙에 성공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교착 상태에 있던 6.25전쟁의 승기를 대한민국이 잡았다. 역사적인 섬으로 그동안 해군이 주둔하면서 섬 출입이 통제돼오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1월 개방되어 106년 만에 일반인들이 그 섬에 드나들고 있다. (자료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자료 주소지: 인천광역시 중구 팔미로 15 (무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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