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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를 갖춘 내전의 중심 전각, 창경궁 통명전과 양화당

들풀/이영일 2016. 11. 4. 12:37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明殿, 보물 제818호)은 창경궁(사적 제123호)의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왕의 생활공간이면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종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불에 타 버려 광해군 때 고쳐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통명전(通明殿)은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 구성이 조선 중기 양식의 특징과 정결한 건물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뒤뜰에는 꽃계단이 마련되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건물 왼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샘,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고 있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숙종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당쟁 속에서 왕권강화를 꾀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장에서 서인을 격침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가, 서인들이 민씨 복위를 꾀하는 과정에서 남인들을 제거한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 두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물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양화당(養和堂)은 통명전의 내전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 재건되었으나 이후에도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1834년(순조 34) 재건된 후 오늘에 이른다.

   양화당(養和堂)의 건물은 정면 6칸·측면 4칸·겹처마에 단층 팔작지붕이며, 장대석(長臺石)의 기단(基壇) 앞에 3개의 돌층계가 있다. 처마를 받치는 공포(栱包)는 익공(翼工) 양식이며, 기둥 간에는 화반(花盤)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長欐)를 받고 있는 소로(小櫨)만을 끼워 간결하게 장식하였다. 건물 내부는 좌우에 온돌방을 깔고 중앙의 3칸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의 중앙에 있는 2칸만 툇마루를 창 없이 개방하였다.

   양화당(養和堂)의 명칭은 서거정(徐居正)이 지었고,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통명전에서 생활하던 내명부(內命婦)의 수장들이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878년(고종 15) 철종의 비(妃)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승하한 곳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주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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