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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의 고통을 백성들과 함께한 정조에 창덕궁 측우대

들풀/이영일 2016. 11. 4. 17:07

  창덕궁 측우대(昌德宮 測雨臺, 보물 제844호)는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정조 6년(1782)에 임금이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측우대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이 명문에 의하면, “1782년(정조 6) 정조가 여름가뭄을 걱정하여 창덕궁의 이문원(璃文院) 앞마당에 측우기를 만들어 세웠다”고 적혀 있다. 기우제를 지내고, 언로를 열며, 죄인을 풀어주는 등의 조처가 계속되자, 가뭄이 그치고 비가 흡족하게 내렸다. 이를 기념하여 임금과 백성의 근심과 기쁨이 함께 얽혀 이 측우기를 만들었다고 직제학 심염조(沈念祖)는 글을 지었다. 1782년의 가뭄 끝에 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측우대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영 측우기(錦營 測雨器, 보물 제561호)는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측우기가 유일하다. 국립고궁박물관 전시된 황동 측우기는 금영 측우기를 복원한 것이다.

   측우기(測雨器)는 높이 31.5㎝, 지름 15.3㎝로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중앙의 두 마디 사이에는 6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반환된 문화재이다. 공주 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조선 기상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오늘날의 '발명의 날'은 바로 세종 24년 5월 19일[丁卯] 전국적으로 측우제도를 시행한 것을 기념하여 1957년 상공부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5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