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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과 창경궁오층석탑(昌慶宮五層石塔)

들풀/이영일 2016. 12. 12. 13:19

  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 보물 제1119호)은 창경궁 안의 연못 옆에 건립되어 있는 탑으로, 8각(八角) 평면(平面)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七層石塔)이다.

   석탑의 기단부(基壇部)는 3단의 바닥돌 위로 높직한 1단의 기단이 올려진 모습인데, 각 면마다 조각으로 가득차 있다. 바닥돌은 4각으로 밑단을 두고 그 위로 2단의 8각 바닥돌을 두었는데, 8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다. 기단과 닿는 곳에는 1단의 연꽃받침을 놓았으며, 기단은 각 면마다 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 역시 연꽃무늬(蓮花紋)와 안상을 장식하였고, 그 위로 높직한 연꽃괴임돌과 2단의 낮은 괴임대를 두어 1층 탑신(塔身)을 받치도록 하였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의 1층 몸돌은 높고 볼록한 모습이다. 2층부터 낮아지며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처럼 기왓골이 표시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후대에 보충한 듯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1층 몸돌에는 4각형의 대리석(大理石)을 끼워 다음과 같은 4행(行)(1행(行)에 3자(字)씩)의 명문(銘文)과 1행(行)의 조성년대(造成年代)가 각자(刻字)되어 있다. “요양중(遼陽重), 개산도(開山都), 강연옥(綱挻玉), 암수탑(巖壽塔)”, “대명성화육년경인세추칠월상한길일조(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 여기의 성화 6년은 조선 성종원년(1470)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 박물관(李王家 博物館)을 건립할 때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였다.

   이 석탑의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 석탑과 비교되는 라마탑(喇痲塔)을 연상케 된다.

   창경궁오층석탑(昌慶宮五層石塔)은 창경궁 정전(正殿), 명정전(明政殿) 뒷편의 환경전(歡慶殿) 돌계단 앞 10시 방향에 있는 불탑(佛塔)이다.

   환경전(歡慶殿)은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된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불탑 1층 탑신에 새겨진 부처님 좌상이 정확히 향하고 있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 왕의 침전 앞에 고려불탑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선왕조의 권위에 훼손을 노려 사찰 어디에선가에서 옮겨온 것이다. 창경궁오층석탑은 1912년 일본에 팔렸다가 다시 국내로 반입돼 1936년경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조선왕실이 제작한 동궐도(東闕圖)에 표시되지 않은 석탑이 1936년 이후 작성된 근대건축도면집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창경궁오층석탑이 고려 중기 충청지역 사찰에 의해 사리탑으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1936년 이후 근대건축도면에 이 탑의 명칭이 사리탑으로 적혀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또한 석탑 부재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과 동일한 '반상흑운모화강섬록암'인 것으로 조사됬고, 사방불(四方佛)이 아닌 탑신 한 면에만 불상을 새긴 고려 석탑은 충남 예산군 석곡리 석탑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게 근거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185, 창경궁 (와룡동)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6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