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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 사적 제107호)

들풀/이영일 2017. 1. 9. 17:52


  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 사적 제107호)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丁若鏞)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正祖)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柳馨遠)과 함께 수원성(水原城)을 설계하고 거중기(擧重機)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水原 華城)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목민심서(牧民心書)』와『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 다산선생이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과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藥泉), 앞뜰에 차를 끓였던 반석인 청석(靑石)인 다조(茶竈),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있고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글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 사적 소제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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