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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關羽)의 사당, 서울 동묘(東廟)

들풀/이영일 2017. 1. 31. 15:55

  동묘(東廟)는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보물 제142호)를 줄인 말로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밖에 있는 중국 촉한(蜀漢)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關羽, ?∼219)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이다. 동관왕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후에 완성되었고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동무의 비석은 1752년 세워진 것으로 사도세자(莊祖)가 직접 짓고 쓴 ‘무안왕묘비명(武安王廟碑銘)’으로 묘비문 첫 부분에 왕세자가 짓고 쓴 글이라는 의미의 ‘경모예제예필(景慕睿製睿筆)’이라고 되어 있는 관우의 용맹과 충의를 찬양한 글을 새긴비와 서무 비석의 앞면은 ‘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 이라는 제목의 글로 1695년(숙종 21)에 숙종이 지은 것이고, 뒷면에는 영조가 1746년(영조 22)에 짓고 쓴 글인 ‘현덕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 비에는 숙종은 관우의 용맹과 충의를 찬양한 글과 영조는 동.남의 관왕묘(東關廟)를 세우고 신앙을 갖게 된 연혁을 을 기록하여 새긴비이다.

  정전 앞 석등은 석등의 아래 부분에는 ‘광서십사년무자십월일(光緖十四年戊子十一月日)’ 이라고 적혀있어 1888년 10월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전 외부의 '현영소덕의열무안성제묘(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 편액은 고종이 관왕[關羽]를 관제로 추숭하면서 친히 내린 친필이다. 본래 동관왕묘에 있던 편액과 ‘향사이정(享祀釐正)’ 정책에 따라 합사된 다른 관왕묘의 편액이 옮겨져서 같은 내용의 글씨가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정전(正殿) 내부는 전실과 본실로 나누어져 이는데, 전실은 제례를 위한 공간이며 본실에는 관우와 그의 부하 장군들의 조각상을 모셨다. 정전 내부에 ‘현성전(顯聖殿)’ 편액이 있는데, 아마도 정전의 본래 이름으로 보인다. 정전 내부에도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의 편액이 있다.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인들이 관우(關羽, ?∼219)를 신격화해 관왕묘를 왕보다 격상시킨 관제묘(官帝廟)가 약 30만 개 산재해 있다. 국내에는 정유재란(丁酉再亂, 1598년)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이 왜적 퇴치를 기원하며 건립하기 시작했다. 현재 경북 안동, 전북 남원 등 10여 곳에 남아있다. 명군(明軍)이 자체적으로 세운 관왕묘와 달리 17세기 유례가 드문 조선과 명나라 왕(皇)실의 국토수호 의지를 담은 양국 정부가 합작으로 추진한 사업이었다. 선조 32년(1599년) 조선 왕실이 ‘동관왕묘조성청(東關王廟造成廳)’이라는 임시기구를 만들어 명 황제가 파견한 기술자를 포함해 총인원 2400명을 투입해 관왕묘를 건립했다. 묘는 1601년에, 내부 조각상들은 1602년에 완성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처음에는 한양 서남북에도 관왕묘를 세웠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황제가 이를 동관왕묘로 합쳤다고 한다. 자신들을 물리치려는 의도가 담긴 문화유산을 축소·격하시키려던 일제의 의도였다. 일제의 방해에도 동관왕묘의 역사적 가치는 퇴색하지 않았다. 당대 한중 장인들이 힘을 모아 빚어낸 예술성이 잘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 동관왕묘(東關王廟) 왼쪽 감실(龕室)의 관우(關羽), 유비(劉備), 장비상(張飛像) -

   원래 중국 문화이지만 관우상 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해와 달,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그림)나 앞쪽 한 쌍씩의 문무관 배치는 ‘조선식(朝鮮式)’이고 일월오봉도 뒤편에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대형 운룡도(雲龍圖) 역시 조선 중기 왕실 미술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동묘는 중국에 바탕을 둔 유물임에도 한반도의 고유한 색채를 살려 더욱 매력적이다. 관우상 앞에 배치하여 호위하는 문인상(관평關平·왕보王甫)과 무인상(주창周倉·조루趙累)도 실존 인물들로 한 쌍씩을 세운 것도 중국 관제묘는 보통 문인 한 쌍만 놓는데, 문무 한 쌍씩을 배열하는 방식은 조선 왕릉의 석조상 배치와 같이 독특하고 예술성도 높다.

    금동제 관우신상(金銅製關羽神像)은 구리 4000여 근(약 2.4t)을 들여 만든 높이 2.5m의 거작으로 초기에 명나라 단독으로 구리 3800근으로 만들려다 실패 하여 조선 동장(銅匠)의 기술력을 보탠 뒤 300근 정도를 더 투입해 주조에 성공했다. 조선에서 제작된 유일한 관우 금동상으로, 명대에 유행한 당송시대 의복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중국의 대표적 관우 신전인 ‘제저우 관제묘(解州 關帝廟)’나 관우의 목이 묻혔다는 뤄양(洛陽)의 관림(關林)보다 시기가 앞선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1593년 조영한 제저우 관제묘는 청대에 중건됐다. 관림(關林) 역시 18∼19세기에 다시 만들어졌으며 동관왕묘는 본산인 중국과 비교해도 시기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한 차원 높은 문화재라고 한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술저널 ‘문화재 제46권’의 ‘동관왕묘의 조각상연구’ 논문,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사진:이영일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난계로27길 84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7857